서울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KTX 창밖으로 산줄기가 펼쳐져요. 빽빽하게 나무로 뒤덮인 그 산들이 사실 불과 50년 전에 심어진 거라는 건, 잘 모르는 이야기잖아요.
1950년대 초만 해도 그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었어요. 당시 사진을 보면 맨흙이 드러난 비탈들이 보여요. 일제강점기 목재 수탈, 한국전쟁의 파괴,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땔나무 채취의 결과였어요. 한국은 국가가 주도한 두 차례의 치산녹화 10개년계획으로 이를 한 세대 만에 되돌렸어요. 핵심은 결정적인 행정 개편, 마을 단위 동원, 그리고 농촌 가정을 땔나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든 병행 정책이었어요.
이 글에서는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졌는지, 무엇이 투입됐는지,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요.
왜 한국의 산은 민둥산이었을까
산림 황폐화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어요.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원인들이 켜켜이 쌓였어요.
전통 한국 가정의 난방 방식은 온돌이에요. 돌바닥 아래를 나무불로 달구는 복사 난방 방식이죠. 1950년에는 땔나무가 전국 1차 에너지의 약 90%를 공급했어요. 1955년 기준 한국은 연간 가정 연료용으로만 약 1,000만 세제곱미터의 목재와 나뭇가지를 소비했는데, 이는 당시 전국 임목 총량의 약 17%에 해당해요. 국가기록원 기록에는 이대로 방치하면 10년 안에 산이 완전히 민둥산이 된다는 경고가 담겨 있어요.
일제강점기(1910~1945)가 문제를 더 키웠어요. 한국 정부 기록에 따르면 헥타르당 평균 임목축적이 1927년 16.7 세제곱미터에서 1943년 13.2 세제곱미터로 떨어졌는데, 낙폭은 북부 지방이 가장 컸어요. 같은 기록에는 1910년 기준 실제로 나무가 자라는 산지는 전체의 약 21%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린 이차림이거나 민둥산이었다고 나와 있어요. 심각한 벌채 압력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거거든요. 한국전쟁(1950~1953)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추가 파괴가 일어났어요.
도벌도 만성적인 문제였어요. 1953년부터 1963년 사이에는 전국 불법 벌채량이 합법적인 벌채량의 약 1.3배에 달했어요. 1964년 지리산 사찰림에서만 2년 동안 1만 세제곱미터 이상의 목재가 불법으로 벌채된 사건도 있었어요. 1967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연평균 약 3,000건의 도벌 사건이 발생했어요.
화전은 1973년 기준 약 12만 5,000헥타르에 달했고, 약 30만 가구가 생계를 의존했어요.
1953년이 되면 전국 산림 면적의 절반가량이 황폐화되고, 임목축적은 헥타르당 약 5.7 세제곱미터까지 무너졌어요. 일제 시대 산림 통계가 시작된 1927년 이후 최저치였어요.
어떻게 복원했을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행정 개편
산림녹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 심기가 아니었어요. 산림청이 어느 부처에 속했느냐였거든요.
1967년 설립된 산림청은 농림부 산하 독립 기관으로 운영됐어요. 전문 기술은 있었지만 단속 권한이 제한적이었어요. 그 사이 산림은 계속 황폐해졌고요.
1973년 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청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이관했어요. 이 한 번의 조치로 전국 지방 행정 조직 전체가 산림 단속에 투입됐어요.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이 산림 기술 직원들과 함께 조림 목표 달성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게 된 거예요. 단순한 정책 전환이 아니라 단속 결정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기자회견에서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을 발표했어요. 최종 계획은 1973년 6월 21일에 확정됐어요. 목표는 야심찼어요. 10년 안에 100만 헥타르를 조림하고 약 21억 본의 묘목을 생산한다는 거였어요.
결과는 목표를 초과했고, 예상보다 훨씬 빨랐어요. 1978년까지 108만 헥타르를 조림해 목표 대비 108%를 달성했고, 당초 1982년이었던 완료 예정일보다 4년 앞서 끝냈어요. 산림청 영문 사이트는 100만 헥타르 이상의 황폐 산림이 복원되었고 10년 계획이 4년 앞당겨 완료됐다고 기재하고 있어요.
새마을운동이 한 일
마을 단위 사업은 박정희의 전국 농촌 개발 운동인 새마을운동을 통해 진행됐어요. 새마을양묘는 1973년부터 1978년 사이 전국 묘목 생산량의 약 34.8%를 담당했어요. 새마을조림은 약 47만 3,000헥타르를 식재해 제1차 계획 전체 면적의 약 43~44%를 차지했어요.
역할 분담은 명확했어요. 정부가 묘목과 비료를 무상 지원하고, 지자체가 운송을 맡고, 주민들이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이었어요. 참여 가구에 지급된 임금을 포함해 1973년부터 1979년 사이 마을 수익은 123억 원으로 보고됐어요. 새마을 사방사업도 1973년부터 1975년 사이 전국 사방사업의 약 70.7%를 담당했어요.
제1차 계획 전체 기간 동안 17만 5,000개 기관에서 1,600만 명이 조림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고됐어요. 산림 예산은 1972년 62억 7,500만 원에서 1978년 273억 1,900만 원으로 4배 이상 늘었어요.
연료 전환
조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땔나무가 주요 가정 연료로 남아 있는 한 성공할 수 없었거든요. 정부는 농촌과 도시 가정을 무연탄 연탄으로 이전시키는 병행 사업을 추진하며, 농촌 가정까지 연탄을 공급하기 위한 석탄 철도 인프라와 연탄 공급망을 구축했어요. 1980년대가 되면 전국적으로 취사는 가스로, 난방은 연탄으로 전환이 대체로 완료됐어요. 벌채의 근본 동인이 사라진 거예요.
심은 수종
산림 담당자들은 빠르게 자라는 수종을 위주로 심었어요. 제1차 계획에서는 권장 수종 목록을 기존 42종에서 10종으로 줄였어요. 아까시나무와 리기다소나무는 1950년대부터 마을산림계가 길러온 수종이었는데, 양묘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에요.
한국 산림 과학도 기여했어요. 현신규 박사는 개량된 소나무 품종을 육종해 한국과 미국 양쪽에 보급했고, 빠르게 자라는 포플러 교잡종도 개발했어요. 그의 이름을 딴 현사시나무예요. 현사시나무는 나중에 뉴질랜드에도 수출됐더라고요.
활착 점검
묘목 점검은 계획에 내장돼 있었어요. 검목책임제, 즉 활착 점검 책임제가 제1차 계획의 31개 우선 조치 중 하나였어요.
제2차 계획
제1차 계획의 성과는 곧바로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1979~1987)으로 이어졌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암살됐기 때문에 제2차 계획은 대부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진행됐어요. 초점은 침식 방지용 선구 수종에서 경제림 지대로 옮겨갔고, 1986년까지 33만 4,000헥타르, 원래 목표의 약 83.5%에 달하는 대규모 경제림 단지가 조성됐어요. 조림 목표는 계획 기간 중 두 차례 하향 조정돼 최초 목표의 64.7%인 99만 7,000헥타르로 줄었고, 최종 실적은 96만 6,000헥타르로 조정된 목표의 약 97%를 달성했어요. 축소된 목표마저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정부는 계획을 1년 앞당겨 종료했어요.
권위주의라는 맥락
이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해요.
사업이 선의만으로 굴러간 건 아니에요.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한 건 단속 결정이었어요. 산림 기술 직원뿐 아니라 지역 경찰과 행정 직원까지 조림 목표에 묶어 놓은 거거든요. 마을 단위 조림 할당량은 강제였고, 지방 행정 계층의 무게가 고스란히 뒤를 받쳤어요.
1960년대 초, 정부는 도벌을 밀수·마약 거래·조직범죄와 함께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목재를 벌채하다 적발되면 엄벌한다는 방침을 명시했어요. 화전민은 1974년부터 1979년 사이 정부 사업을 통해 이주하거나 현지에서 정착을 지원받았는데, 영향을 받은 가구가 26만 7,301가구에 달한다고 보고됐어요.
사업은 또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었어요. 1973년 3월 초안부터 '푸른유신'이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이는 1972년 10월부터 1979년까지 시행된 박정희의 유신 헌법 체제와 산림녹화를 명시적으로 연결한 거예요. 전면적인 입산 통제에 대한 반발이 일자, 정부는 1973년 6월 수정안에서 보호 구역에만 한정하는 방향으로 입산 규정을 완화했고, 같은 수정안에서 전국 홍보 조치의 이름에서 '푸른유신' 표현도 삭제했어요. 국가기록원에는 박정희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어요. "10년 안에 산을 외국의 산처럼 완전히 녹화한다는 기본 계획과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
2026년 박·한·김·김이 Environmental Management에 발표한 동료심사 논문은, 한국의 강력한 국가 권위와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때문에 이 사례는 직접 복사할 보편적 템플릿이 아닌 상황에 맞게 참고할 레퍼런스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주장해요. 더 참여적인 거버넌스 규범을 가진 나라에는 특히 그렇고요. 한국 정부와 산림 관련 문헌들은 중앙집권적 집행을 주로 성공 요인으로 서술해요. 학술 문헌은 이 모델의 이전 가능성에 대해 좀 더 신중한 입장이에요.
이 이야기는 같은 시대의 다른 역사 옆에 놓여 있어요. 경제 기적을 만들어낸 바로 그 시기가 광주 항쟁도 낳았잖아요. 5.18 광주 항쟁 해설 가이드에서 그 시대의 정치적 억압을 자세히 다루고 있어요.
오늘날의 영향
이 회복은 현대에 기록된 가장 뚜렷한 대규모 환경 반전 중 하나예요.
전국 임목축적은 1953년 헥타르당 약 5.7 세제곱미터에서 2020년 기준 약 165 세제곱미터로 늘었어요. 산림청은 이를 1953년의 29배라고 설명해요. 한국의 산림 면적은 현재 국토의 약 63%, 약 630만 헥타르로 OECD 회원국 중 산림 면적 비율 4위예요. 비교하면 OECD 평균 임목축적은 헥타르당 약 131 세제곱미터인데, 한국은 약 165 세제곱미터예요.
국가기록원 소식지를 비롯한 한국 정부·기록 자료들은 한국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원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소개하고 있어요.
2025년 4월 10일, 유네스코가 한국의 산림녹화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공식 등재했어요. 이 컬렉션에는 관보, 대통령령, 행정 문서, 사진, 홍보 책자 등 산림녹화 사업을 기록한 9,619건의 정부 기록이 담겨 있어요. 유네스코는 이 기록물을 기후변화·토양 침식·산림 생태계 복원을 다루는 정책과 사업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자료이자, 산림녹화에서 공사 협치의 성공 사례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이번 등재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총 20건이 됐어요.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한국은 2022년 5월 서울에서 FAO와 공동으로 제15차 세계산림총회를 개최했어요. 약 160개국에서 약 1만 5,000명이 참가했어요. 총회에서는 기후변화·생물다양성 손실·토지 황폐화·빈곤 문제에서 산림의 역할을 담은 '서울 산림 선언'이 채택됐어요.
산림청은 37개국과 산림 협력 협정을 맺고(2022년 기준), 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를 통해 아시아 전역에서 산림 협력 사업을 지원하고 있어요. 이 궤적은 IMF 이후 해설 가이드에서 다루는 흐름과 닮아 있어요. 한때 위기로 국제적 주목을 받던 나라가 이제 해법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는 거예요.
이후의 계획들과 열린 질문
산림 계획은 두 차례의 10개년계획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제2차 계획이 1987년 끝나자 산림청은 농림부로 복귀했고, 제3차 기본산림계획은 명칭이 치산녹화계획에서 산지자원화계획으로 바뀌었어요. 국가기록원은 녹화가 달성된 이후 정부가 산림의 공익 기능과 경제 기능을 균형 있게 관리하는 지속가능한 산림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 회복을 생물다양성 증진과 산림의 수자원 함양·휴양 서비스 향상의 성과로 인정하고 있어요.
제1차 계획의 우선순위는 속도였어요. 국가기록원은 이를 국토 녹화를 목표로 한 양적 조림이라고 설명하고, 제2차 계획의 가장 큰 정책 변화를 양적 조림에서 질적 조림으로의 전환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한국 산림의 생태적 질에 관한 이야기는 산림녹화 성과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식목일과 한국에서 마주치는 것들
식목일은 4월 5일이에요. 한국의 첫 식목일 행사는 1946년 4월 1일에 열렸어요. 4월 5일이 공식 날짜이자 공휴일로 지정된 건 1949년이에요. 산림녹화 시기 내내 주요 식재 캠페인 동원일 중 하나로 활용되다가 2005년 공휴일 규정 개정으로 2006년부터 공휴일 지위를 잃었어요.
지금도 매년 4월 5일을 전후해 지자체, 학교, 지역 단체들이 나무 심기 행사를 열어요. 4월 초에 자녀 학교나 지역 주민센터에서 나무 심기 봉사 행사를 만나게 된다면, 그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주변에 보이는 산림이 바로 그 사업의 결실이고, 지금의 행사는 그 흐름을 이어받은 거예요.
자주 묻는 질문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이 산림을 복원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임기에 시작해 예정보다 4년 앞선 1978년에 완료됐어요. 제2차 계획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진행됐는데, 대부분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어요. 방식은 국가 주도에 강압적인 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분명해요. 약 25년 만에 전국 산림 황폐화를 사실상 되돌렸고, 그 과정은 한국 정부 기록과 동료심사 연구에 문서화되어 있어요.
한국 산이 원래 민둥산이었던 이유가 뭔가요?
여러 원인이 겹쳤어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대량의 목재가 수탈됐고, 한국전쟁(1950~1953)으로 추가 피해가 생겼어요. 가장 오래 지속된 원인은 온돌 난방용 땔감 수요였거든요. 1950년 당시 땔나무가 전국 1차 에너지의 약 90%를 담당했어요. 도벌은 1953년부터 1963년 사이 합법적인 벌채량의 약 1.3배에 달했어요. 화전은 1973년 기준 약 12만 5,000헥타르에 이르렀어요. 1953년에는 전국 산림 면적의 절반가량이 황폐화되었고, 임목축적은 헥타르당 약 5.7 세제곱미터까지 무너졌어요.
땔나무에서 연탄으로 바꾼 게 어떻게 도움이 됐나요?
근본 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이에요. 농촌과 도시 가정이 온돌 난방을 위해 땔나무에 의존하는 한, 심어봤자 또 베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정부는 연탄을 대체 연료로 보급하고 농촌까지 공급할 수 있도록 석탄 철도 인프라를 구축했어요. 1970년이 되면 도시 가정의 산림 연료 의존 비율이 약 7%까지 떨어져 도시 대체는 사실상 완료됐어요. 198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취사는 가스로, 난방은 연탄으로 전환됐고, 나무를 연료로 베려는 동기 자체가 사라졌어요. 연료 전환과 조림 사업은 함께 작동했어요.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거예요.
새마을운동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새마을운동이 마을 단위 사업을 맡았어요. 새마을양묘는 1973년부터 1978년 사이 전국 묘목 생산량의 약 34.8%를 담당했어요. 새마을조림은 약 47만 3,000헥타르를 식재해 제1차 계획 전체 면적의 약 44%를 차지했어요. 정부가 묘목과 비료를 무상 지원하고, 지자체가 운송을 맡았으며, 주민들이 노동력을 제공했어요. 1973년부터 1979년 사이 마을 수익은 123억 원으로 보고됐어요.
방식이 얼마나 권위주의적이었나요?
명백히 강압적인 면이 있었어요.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면서 도지사와 경찰서장이 조림 목표에 대한 직접적인 단속 권한을 갖게 됐거든요. 도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한다는 방침 아래 '4대 사회악' 중 하나로 지정됐어요. 마을 할당량은 강제였어요. 이 사업은 1973년 3월 초안부터 '푸른유신'이라는 이름을 달아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유신 헌법 체제(1972~1979)와 산림녹화를 명시적으로 연결했어요. 2026년 Environmental Management에 게재된 동료심사 논문은, 한국의 중앙집권적 권위 모델은 더 참여적인 거버넌스 규범을 가진 나라들이 많은 만큼 직접 복사할 보편적 템플릿이 아닌 상황에 맞게 참고할 레퍼런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해요.
오늘날 한국 산림은 어떤 모습인가요?
전국 임목축적은 1953년 헥타르당 약 5.7 세제곱미터에서 2020년 기준 약 165 세제곱미터까지 회복됐어요. 산림청 기준 1953년의 29배예요. 산림 면적은 국토의 약 63%, 약 630만 헥타르로 OECD 회원국 중 산림 면적 비율 4위예요. 국가기록원을 비롯한 한국 정부·기록 자료들은 한국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원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소개하고 있어요.
식목일은 아직도 기념하나요?
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어요. 식목일은 4월 5일이에요. 한국의 첫 식목일 행사는 1946년 4월 1일에 열렸고, 4월 5일이 공식 날짜이자 공휴일로 지정된 건 1949년이에요. 산림녹화 시기 내내 공휴일로 유지되다가 2006년부터 공휴일 지위를 잃었어요. 지금도 4월 5일을 전후해 지자체, 학교, 지역 단체들이 나무 심기 행사와 자원봉사 캠페인을 열어요.
이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을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가요?
산림녹화 사업은 경제 기적, 민주화 운동과 함께 박정희 시대 개발국가가 이룬 가장 결정적인 대규모 성취 중 하나예요. 재벌 이야기나 IMF 이후 회복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패턴이 보여요. 중앙집권적이고 국가 주도적인 동원 사업이 빠른 속도로 측정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대가로 치렀고, 그 결과는 그것을 낳은 정치 체제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 KTX 창밖으로 보이는 산림이 그 국가 역량의 물리적 유산이에요. 한국이 지금 개발도상국에 산림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이 그 외교적 유산이고요.